
저자: 최인서
출판: 다이브
출간: 2026년 8월 31일
최인서의 <한국사 이상현상 연구원>은 2026년 8월 다이브에서 출간된 소설이다. 한국의 역사 유적에서 일어나는 이상현상을 조사하는 비밀 기관이라는 설정을 바탕으로, 탐사 지침과 사건 보고서, 음성 녹취록과 같은 기록들을 따라 이야기가 진행된다.
우선 취향부터 이야기해야겠다.
나는 SCP를 상당히 좋아한다. 이우혁 작가의 <퇴마록>도 최근 나온 신세편까지 모두 구입해 가지고 있는 팬이다.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그것을 조사하거나 상대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뒷면에 전혀 다른 질서가 숨어 있다는 이야기에 쉽게 마음이 간다. 그러니 이 책에 대한 감상에는 시작부터 어느 정도의 편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
가장 먼저 떠오른 인상은 SCP와 퇴마록이 결합한 현대적인 글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두 작품을 그대로 섞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이한 현상을 문서로 정리하고 관리하려는 형식에서는 SCP가,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와 장소에 괴기가 스며드는 감각에서는 퇴마록이 떠올랐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좋아하던 두 가지가 한 책 안에서 만난 듯한 반가움에 가깝다.
SCP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괴물의 생김새나 강함보다, 그것을 어떻게든 분류하고 설명해 두려는 태도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대상을 앞에 놓고도 기록을 남기고 규정을 만든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일단 업무는 해야 한다는 듯한 무심함. 그 건조한 형식 때문에 오히려 어딘가에서 정말 이런 문서를 작성하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퇴마록을 읽을 때의 즐거움에는 또 다른 부분이 있다. 역사나 종교, 전승처럼 현실에 발을 걸친 요소들이 이야기 안으로 들어오면, 처음부터 모두 만들어 낸 세계와는 조금 다른 무게가 생긴다. 알고 있던 이름이나 배경을 발견하는 반가움도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끼어들 자리가 생겨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의외로 이 책의 초반부터 완전히 몰입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흥미로운 설정을 갖춘 정보들을 하나씩 나열하는 방식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지, 기묘한 항목들을 읽는 재미와 소설을 읽는 재미 사이에서 전자 쪽에 더 가까운 책은 아닐지 싶었다. 하나의 설정을 짧게 접할 때는 매력적인 형식이라 해도, 책 한 권을 계속 같은 호흡으로 읽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그 인상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무엇이 적혀 있는지를 읽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이 기록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음에는 무엇을 알게 될지가 궁금해졌다. 정보의 목록처럼 받아들이던 문장들이 이야기의 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고, 처음에 조금 떨어져 지켜보던 거리도 자연스럽게 좁아졌다.
이 변화가 좋았다. 형식이 독특하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읽게 하는 책은 오래 가기 어렵다. 낯선 형식에 익숙해진 뒤에도 다음 장이 궁금해야 하는데, 이 책은 내게 그 지점을 만들어 주었다. 초반에 잠깐 들었던 의심까지 포함해서, 뒤로 갈수록 더 즐겁게 읽은 책이었다.
현실적인 내용과 괴기의 혼합이 이렇게 즐거울 줄은 몰랐다. 정확히는, 원래부터 좋아하던 조합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읽힐 수 있다는 점이 반가웠다.
역사 유적은 그 자체로 현실에 남아 있는 과거다. 사람들은 그곳을 찾아가고, 안내문을 읽고, 정해진 동선을 따라 걸으며 사진을 남긴다. 그런 익숙한 공간에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끼어들면, 아주 먼 우주나 이름 모를 이세계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와는 다른 감각이 생긴다. 현실과 괴기의 경계가 대단한 장치를 통과해야만 넘어갈 수 있는 곳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에 등장하는 이상현상을 실제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실에서 가져온 요소들이 충분히 구체적이면, 그 사이에 놓인 허구도 함께 만져질 듯한 질감을 갖는다. 어디까지가 알고 있던 것이고 어디서부터 작가의 상상인지 생각해 보는 과정 자체가 또 하나의 재미가 된다.
읽으면서 영화로 만들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록으로 접했던 장소를 실제 화면으로 보고, 글자로 읽었던 목소리를 소리로 듣는다면 어떨까. 익숙한 공간을 보여 주면서도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느낌을 조금씩 쌓아 간다면 상당히 좋은 분위기가 나올 것 같다. 물론 보고서를 읽으며 빈 곳을 상상하는 재미를 그대로 영상으로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눈앞에 보여 주는 순간 오히려 덜 흥미로워지는 부분도 있을 테니, 무엇을 보여 주고 무엇을 끝까지 남겨 둘지가 중요할 듯하다.
단순히 무서운 형상을 잘 만드는 것보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던 장소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영화라면 좋겠다.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영화에 주문이 많지만, 그만큼 장면으로도 보고 싶은 책이었다.
책을 읽고 난 뒤에는 조금 엉뚱하게도 내가 쓰는 과학책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과학과 괴기, 공포, 추리를 이런 방식으로 결합해 보면 어떨까.
존재하지 않는 연구기관이나 사건을 설정하되, 그 안에서 발견하는 물질의 성질과 현상, 사건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과학적 요소들은 실제 사실로 구성하는 것이다. 설정은 픽션이지만 요소는 팩트인 과학 대중서. 독자가 이상한 사건의 정체를 궁금해하며 따라갔는데, 그 과정에서 접한 과학은 현실에 그대로 남아 있는 형식이다.
과학을 설명한 뒤 그 위에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덧입히는 정도로는 재미가 없을 것 같다. 물질이 실제로 갖는 성질 때문에 사건이 일어나고, 그 성질을 이해해야 앞서 읽은 기록의 의미도 달라지는 쪽이 훨씬 흥미롭다. 허구의 사건을 풀어 가는 데 실제 지식이 필요해진다면, 설명을 읽는 이유도 조금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쓰는 입장에서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창작인지 분명하게 해 두어야 할 것이다. 과학책을 읽고 존재하지 않는 현상까지 사실로 기억하게 만든다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모든 답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 테니, 이야기에 몰입하는 즐거움과 실제 과학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함께 만들 방법이 있을 것 같다.
괴기를 읽다가 과학책을 어떻게 쓸지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다.
좋아하는 종류의 이야기를 충분히 즐긴 데 더해, 나도 이런 방식으로 무언가 써 보고 싶다는 마음이 남았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자꾸 다른 생각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꽤 반가운 독서였다.
서지 정보: 영풍문고 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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