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0 – George Wylesol(조지 와일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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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0 한국어판 표지
2120 · 프시케의숲 (표지 출처: 영풍문고)

글·그림: 조지 와일솔
번역: 안민재
출판: 프시케의숲
출간: 2026년 8월 15일

어릴 적 가장 사랑했던 책은 게임 <이스(Ys)>를 주제로 삼은 어드벤처북이었다. 글을 읽다가 선택지가 나오면 원하는 행동을 고르고, 그에 해당하는 페이지를 찾아가 이야기를 이어가는 방식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어서는 이야기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고, 어떤 선택은 새로운 모험으로 연결되었지만 어떤 선택은 그대로 게임오버가 되기도 했다. 책을 읽는 것과 게임을 하는 것이 거의 같은 일이었던 셈이다.

그 책에서는 글과 삽화 사이를 한없이 오갈 수 있었다. 글을 읽으며 장소를 상상하고, 삽화를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생각했다. 그림에 표현되지 않은 풍경이나 인물의 움직임은 머릿속에서 이어졌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 전까지는 얼마든지 그 장면에 머물 수 있었고, 선택하지 않은 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궁금해할 수도 있었다. 책 한 권에 담긴 그림의 수는 정해져 있었지만, 그 안에서 상상할 수 있는 장면까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단순히 이야기가 재미있어서만 좋아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무언가를 결정하고 있다는 느낌이 좋았다. 이미 인쇄되어 있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인데도, 어떤 페이지에 도착할지는 내 선택에 달려 있었다. 실패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선택을 조금 더 고민했고,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책을 다시 펼칠 수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다고 해서 반드시 책을 다 읽은 것도 아니었다.

어느새 그런 책들을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겠지만 적어도 내 눈에 들어오는 일은 드물어졌다. 선명하고 화려한 그래픽으로 가득한 화면이 어디에나 있고,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면 훨씬 복잡한 세계를 탐험할 수 있는 시대라서일까. 선택에 따라 페이지를 찾고, 앞서 읽은 내용을 기억하고, 정지된 그림 사이의 움직임을 상상하는 일을 굳이 책으로 해야 할 이유가 줄어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게임을 좋아하고 그런 화면을 충분히 즐기는 사람이니, 예전에는 상상력이 풍부했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편리해진 만큼 좀처럼 하지 않게 된 행동들이 있고, 그 행동에 붙어 있던 즐거움도 함께 멀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든다. 다음 장면이 바로 나타나는 대신 손으로 페이지를 찾아 넘기는 짧은 시간에도 나름의 기대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2120>은 정말 반가운 책이었다.

이야기는 컴퓨터 수리기사 웨이드 더피가 일을 하러 건물을 찾아가면서 시작된다. 고장 난 컴퓨터를 고치고 돌아오면 될 일이지만,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이 잠기면서 평범한 업무가 낯선 건물에서 출구를 찾는 일로 바뀐다. 독자는 웨이드가 되어 방과 복도를 돌아다니고, 단서를 살펴보며, 다음에 어디로 이동할지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정은 실제로 다른 페이지를 찾아가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2120 건물 외관과 첫 선택지
Avery Hill Publishing 공식 미리보기 · © George Wylesol

어릴 적 어드벤처북에서 익숙했던 방식이다. 다만 그때의 모험을 떠올리며 펼친 책 안에는 상당히 불길한 공간이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장소가 궁금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마음에, 이곳에서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불안이 더해진다. 같은 선택형 구조라도 어떤 세계를 담느냐에 따라 기분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2120>의 공간은 화려한 판타지 세계와는 거리가 있다. 사무실과 복도, 문과 계단처럼 익숙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이 비어 있고, 비슷한 통로가 이어지고, 내가 이곳의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신하기 어렵다. 특별히 무서운 것을 마주치지 않아도 장소 자체가 조금씩 꺼림칙해지는 것이다.

이 책을 설명할 때 등장하는 ‘백룸 호러’라는 말도 그런 감각과 연결된다. 우리가 평소에는 목적지를 향해 지나치는 공간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게 되었을 때의 불편함이다. 복도는 어딘가로 가기 위해 있는 곳인데, 계속 복도만 나온다면 그때부터는 익숙한 장소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어디에 있는지는 대략 알겠는데 왜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 사람을 긴장시킨다.

그림도 그런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기하학적인 형태와 평평한 색, 오래된 컴퓨터 화면을 떠올리게 하는 질감은 공간을 보여주면서도 많은 것을 비워 둔다. 눈앞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이지만 그곳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이지 않는 쪽에는 무엇이 있는지까지 알려주지는 않는다. 어릴 적 삽화를 들여다보며 그림 밖의 세계를 상상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그 빈 곳에 불길한 가능성을 채워 넣게 된다.

2120 녹색 벽과 문이 있는 실내
Avery Hill Publishing 공식 미리보기 · © George Wylesol

궁금해서 작가 인터뷰를 찾아보니, 실제로 오래된 포인트 앤 클릭 게임을 하다가 이 형식이 책에서도 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공간의 시각적 영감을 얻은 경험이었다. 작가는 한동안 반쯤 비어 있는 사무실 건물을 청소하는 일을 했고, 그곳에 남겨진 서류나 개인 물건, 사용되지 않는 공간들을 사진으로 기록했다고 한다. 누군가의 평범한 일터였던 장소가 이런 이야기의 재료가 되었다는 점이 좋았다. 사람이 사라진 뒤에도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공간은 제법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 책의 형식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독자가 직접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다. 소설 속 주인공이 수상한 문을 열면 왜 굳이 저기를 들어가는지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내가 갈 곳을 골라야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다른 곳은 이미 살펴보았거나, 저 너머에 필요한 단서가 있을 것 같거나, 단순히 궁금해서라도 결국 문을 열게 된다. 공포 이야기 속 인물이 하는 행동을 이해하는 데는 그 결정을 직접 해보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을 것이다.

물론 페이지를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과정이 번거롭게 느껴질 수도 있다. 화면이라면 한 번 누르고 끝날 일을 손으로 넘겨 가며 처리해야 하고, 놓친 것이 있는지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이야기를 편하게 따라가고 싶은 사람에게는 그런 과정이 흐름을 끊는 일일 수도 있다. 나에게는 바로 그 번거로움이 오래전의 기억과 연결되었다.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책을 뒤적이는 행동부터 이미 이 책을 즐기는 방식의 일부였다.

게임오버가 존재하던 어린 시절의 책을 생각하면, 선택이 있다는 것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뜻만은 아니었다. 잘못 판단할 수 있고, 같은 곳으로 돌아올 수 있으며, 기대하던 장면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작은 긴장이 유지되었다. <2120> 역시 독자에게 방향을 고르게 하면서 그 선택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쉽게 확신하지 못하게 한다. 오래된 형식이 이 책의 불안한 분위기와 잘 맞물리는 부분이다.

선명한 화면은 많은 것을 보여준다. 움직임과 소리까지 더해지면 우리가 상상해야 할 부분을 놀라울 만큼 구체적으로 눈앞에 만들어 낸다. 그런데 가끔은 정지된 그림과 짧은 글만 주어진 채, 그다음을 내가 생각해야 하는 방식도 그립다. 기술적으로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남겨진 것처럼 보이던 여백이, 어떤 이야기에서는 오히려 오래 머물고 싶은 자리가 되기도 한다.

<2120>이 반가웠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독특한 형식을 가진 호러 그래픽노블이라는 설명에 앞서, 한동안 잊고 있던 책 읽는 방식을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어릴 적 <이스> 어드벤처북을 읽으며 즐거웠던 것은 인쇄된 이야기를 따라가면서도 그 안에 내가 들어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꽤 흐른 뒤 다시 페이지를 골라 찾아가는 책을 만났고, 이번에는 그 안에서 출구를 찾게 되었다.

어릴 때는 책 속 세계에 더 오래 머물고 싶었다면, 이번에는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한다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도 이런 책을 다시 만났다는 사실만큼은 무척 반갑다.

참고: Avery Hill Publishing 작가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