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qntm(샘 휴즈)
번역: XCninety
출판: 황금가지
출간: 2026년 10월
SCP 세계관을 워낙 좋아한다. 기이한 존재 자체도 흥미롭지만, 그것을 어떻게 발견했고 무엇을 주의해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 격리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세부적인 이야기들이 특히 좋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보고서의 형식으로 진지하게 다루는 태도. 누군가에게는 황당하게 보일 설정도 그 안에서 지켜야 할 규칙과 실패의 기록이 쌓이면 제법 그럴듯한 세계가 된다.
앞서 <한국사 이상현상 연구원>을 읽으면서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출판된 책으로 만나는 일이 반가웠다. 인터넷에서 이런저런 문서를 찾아 읽으며 즐기던 취향이 책장에도 자리를 잡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차에 <항밈학과 같은 건 없습니다>를 만났다. SCP에서 출발한 항밈학과 연작을 개작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갖지 않기가 어려웠다.
항밈이라는 말은 처음 보면 조금 낯설다. 널리 퍼져 나가는 밈과 반대로, 그 자체의 성질 때문에 전달되거나 공유되기 어려운 관념이라고 생각하면 출발하기 좋다. 여기에 변칙적인 성질이 더해지면 자신을 기억하거나 기록하는 일조차 어렵게 만드는 존재가 된다. 무언가를 마주쳤는데 그것을 기억할 수 없다면, 어떻게 위험을 알아차리고 다음에 대비할 수 있을까. 심지어 이미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어떨까. 이 책의 출발점부터 꽤 매혹적이다.

그런데 읽으면서 예상보다 크게 다가온 것은 그 안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었다. SCP의 문서들을 읽다 보면 연구원과 요원,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허무할 정도로 갈려 나간다. 몇 명이 사망했고 어떤 실험이 실패했으며 격리 절차가 어떻게 수정되었다는 식으로 정리되곤 한다. 그 건조함이 SCP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읽는 입장에서도 어느새 사람의 죽음을 해당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정보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책에서는 그 숫자 뒤에 있는 사람들을 조금 더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가 목숨을 잃는 일도 끔찍하지만, 그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조차 남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다른 종류의 두려움을 준다. 누가 싸웠는지, 무엇을 막았는지, 왜 돌아오지 않았는지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떨까. 남겨진 사람에게 슬퍼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수 있다. 세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될 텐데, 그것을 다행이라고만 말하기가 어려워진다.
기억을 지우는 일의 무게도 달라진다. SCP에서 기억 소거는 기밀을 유지하거나 사건을 수습하기 위한 익숙한 절차다. 그러나 당사자에게는 그저 정보 몇 줄을 삭제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어떤 경험을 잊으면 그 경험 때문에 내렸던 판단도, 누군가를 믿거나 두려워하게 된 이유도 함께 흔들릴 수 있다. 자신을 이루던 일부가 사라졌는데, 사라졌다는 사실까지 모를 수 있다는 것이 꺼림칙하다.
그렇다고 기억을 유지하는 일이 언제나 안전한 것도 아니다. 알고 있다는 사실이 위험이 되고, 잊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기억은 더 이상 당연히 지켜야 할 자산으로만 남지 않는다. 살기 위해 버려야 하는 것과 살아 있는 자신으로 남기 위해 붙잡아야 하는 것이 충돌한다. 그런 상황에서 무언가를 기억하겠다는 선택은 생각보다 훨씬 무거워진다.
이런 이야기를 가능하게 만드는 ‘관념’의 묘사도 무척 좋았다. 관념이라는 단어는 일상에서 쓰면 막연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 막연한 것에 작동 방식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있으며, 인간이 접근하고 개입할 여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눈에 보이는 괴물의 외형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과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형체가 없는 것을 읽고 있는데도 머릿속에서는 계속 무언가의 형태를 만들어 보게 된다.
특히 다음과 같은 대목이 기억에 남았다.
만약 관념 공간에서 무언가 현실로 넘어와 물리적 형체를 갖출 수 있다면 그 반대도 성립해야 한다. 어떤 물리적 실체를 붙잡아 그것이 함의하는 관념을 기계적으로 추출한 다음, 그 관념을 증폭하여 관념 공간에 송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설정은 터무니없을 만큼 기괴한데, 그다음 생각은 이상하리만큼 논리적이다. 한쪽 방향으로 가능하다면 반대 방향도 검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무언가 영향을 미친다면 그 영향을 이용할 방법도 있지 않을까. 낯선 현상을 마주하고도 끝내 작동 원리를 추론하고 실험할 방법을 찾으려는 태도가 마음에 든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도 좋다.
과학적인 사고와 괴기가 함께 있을 때의 재미가 이런 데 있다고 생각한다. 출발점이 현실의 법칙을 벗어나 있더라도, 주어진 조건 안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어떤 결과가 따라오는지를 끝까지 따져 볼 수 있다. 설명이 붙는다고 반드시 공포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조금 이해하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 깨닫게 될 수도 있으니까. 이 책의 상상력은 그런 방향으로도 즐겁게 뻗어 나간다.
하지만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문장은 훨씬 인간적인 쪽에 있었다.
인간은 무엇이든 잊을 수 있어. 어떤 건 잊어버려도 괜찮아. 사람은 필멸하고 유한하니까. 하지만 어떤 것들은 기억해야만 해. 우리가 기억한다는 게 중요하거든. 자네가 잊지 않도록 해 줄 만한 문장을 적어.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 실제로 우리는 많은 것을 잊으며 살고, 잊을 수 있어서 견디는 일도 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어떤 것은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이 좋았다. 기억력이 좋고 나쁜 문제를 넘어,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정하고 그것을 잃지 않으려는 행동처럼 읽혔다. 문장을 적는다는 작고 평범한 일조차 그런 상황에서는 꽤 절박한 저항이 된다.
처음에는 어떤 기묘한 존재와 설정을 만날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읽고 나서는 그것을 상대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잃고, 무엇을 끝까지 남기려 하는지를 더 생각하게 되었다. 괴이한 세계를 잘 만들어 놓은 책은 많지만, 그 세계에서 소모되는 목숨의 의미까지 새삼 돌아보게 하는 경험은 조금 다르다. SCP를 좋아해 온 입장에서 이 책이 특히 반가웠던 이유다.
여전히 나는 미신, 오컬트, 괴기, 미스터리 및 형언할 수 없는 기괴한 모든 것들을 믿는다.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규칙을 붙이고, 이름을 부여하고, 어떻게든 기록해 두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좋아한다. 어쩌면 내가 이런 기록을 자꾸 찾아 읽고 책장에 꽂아 두는 일 역시, 잊지 않도록 문장을 적어 두는 행위와 조금은 닮아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