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선 이름, 이미 알고 있던 음악.
작곡가 이름만 보고는 누군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Adrián Berenguer. 이름도 읽는 법부터 잠시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그의 곡 ‘Little Things’를 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 이 음악!” 하고 반응할 사람이 꽤 많을 것이다. 광고였는지, TV나 라디오였는지, 무심코 넘기던 짧은 영상이었는지. 어디서 들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도 귀에는 남아 있는 음악이다.
실제로 그의 소속 레이블 소개에 따르면 ‘Little Things’는 틱톡에서만 900만 개가 넘는 영상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는 느낌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름보다 음악이 훨씬 먼저 우리 주변에 도착해 있었던 셈이다.
‘Little Things’에는 작은 움직임을 자꾸 바라보게 만드는 듯한 매력이 있다. 가볍게 되풀이되는 선율이 편안하면서도 마냥 느슨하지는 않다. 일상적인 장면에 붙이면 그 장면이 조금 더 사랑스러워질 것 같은 음악이다. 배경으로 흐를 때는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따로 들으면 그동안 배경에 묻혀 있던 표정이 보인다.
하지만 내가 이 작곡가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이 곡이 아니었다. 시작은 ‘Red Dress’였다. 그것도 공포 게임에서였다.
대만 공포 게임 〈여귀교 2〉에는 발레리나 귀신을 상대하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귀신에게 시선을 두고 움직임을 살피며 접촉을 피해야 하는 상황인데,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은 기괴하면서도 우아한 춤이다. 그 대면 장면에 흐르는 곡이 ‘Red Dress’다. 음악이 무엇인지 묻는 스팀 게시판의 질문과 답변을 보면, 그 장면에서 나와 비슷한 궁금증을 느낀 사람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무서워야 하는데 음악이 너무 좋았다. 상황은 분명 위험한데, 그 장면을 이루는 춤과 음악에는 넋을 놓게 되는 구석이 있었다. 공포 게임을 보다가 음악부터 찾게 될 줄은 몰랐다. 도대체 무슨 곡인가 싶어 계속 찾아보다가 ‘Red Dress’라는 제목과 작곡가의 이름을 알게 됐다.
이 곡은 게임을 위해 새로 만든 전용 음악이 아니라, 2022년 앨범 〈Beyond〉에 먼저 수록된 작품이다. 게임에서의 강렬한 인상 때문에 그 장면을 위해 작곡한 것처럼 느껴졌는데, 원래 존재하던 곡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독특하다. 작곡자의 의향과 무관하게, 음악이 활용된 매체 속 장면을 거쳐 전혀 다른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경우다.
따로 들어도 ‘Red Dress’는 충분히 극적이다. 우아하게 흘러가다가도 어느 순간 힘이 붙고, 그 흐름을 따라 듣다 보면 짧은 공연 하나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듣기 좋은 선율 안에 긴장과 추진력이 함께 있다. 귀신이 등장하지 않아도 매력적인 곡이지만, 이제는 그 춤을 완전히 떼어 놓고 듣기가 어렵다.
그렇게 다른 곡들을 찾아 듣다가 플레이리스트에 차곡차곡 더하게 됐다. 스페인 알리칸테 출신의 작곡가이자 색소폰 연주자, 프로듀서로, 광고와 게임 등 여러 분야에서 음악을 만들어 온 사람이라고 한다. 그의 음악이 유독 장면을 쉽게 떠올리게 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번에 함께 소개하고 싶은 ‘Presto’도 그 목록에 들어 있다.
‘Presto’는 음악에서 ‘매우 빠르게’를 뜻하는 말이다. 제목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기분이 즐겁다. 단지 빠르기만 해서 정신없는 음악과는 다르다. 움직임이 또렷하고, 그 안에서 다음 흐름을 따라가는 재미가 있다. 가만히 앉아 듣고 있어도 머릿속에서는 무엇인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
‘Little Things’가 일상의 작은 풍경에 시선을 머물게 한다면, ‘Red Dress’는 그 풍경을 극적인 무대로 바꾸어 놓는다. ‘Presto’에서는 그 무대 위 움직임에 조금 더 탄력이 붙는 느낌이다. 같은 작곡가의 음악인데도 각각 떠오르는 장면이 다르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부담 없이 다음 곡을 누르게 된다는 점이다. 과도하게 길게 끌지 않으면서도, 곡마다 기억할 만한 선율이나 분위기가 있다. 편하게 틀어 두기 좋은 음악도 있고, 듣다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게 되는 음악도 있다.
플레이리스트에 쭉 추가해 듣고 있으면 대체로 기분 좋게 흘러간다. 그러다 그 무난히 좋은 곡들 사이에서 유독 압도적인 곡이 하나씩 튀어나온다. 방금 나온 곡이 뭐였는지 확인하고, 제목을 기억하고, 다시 재생하게 된다. 모든 곡에 똑같이 감탄하는 것보다 이런 발견이 더 즐겁다.
처음에는 공포 게임 속 한 장면에 붙어 있던 음악을 찾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곡을 따라가니 이미 여러 번 들었던 음악이 나왔고, 앞으로 자주 듣게 될 음악도 여럿 생겼다.
이름은 낯설었지만, 이제는 친근하다.